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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친일

성일종은 을사조약을 잊은걸까?

by 잘될거야 곰프로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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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종은 국회의원이다. 그런데 국민을 대표하여 의정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장학금 전달식에서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조선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을 장학제도의 성공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한 격려사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정상인가?
 
지난 3일 서산장학재단 장학금 전달식에 참석한 성일종 국민의힘 충남 서산·태안 국회의원이 인재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일본의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언급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을 일으킨 성의원의 발언 내용-
 "과거에는 일본 청년 5명이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이토 히로부미이며, 다음 세대를 양성할 수 있는 제도가 없을 때 그는 금괴를 훔쳐 장학금을 만들었고, 그 장학금을 이용하여 공부한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을 개화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에 끔찍한 사태를 일으켰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인재육성의 선례로 볼 수 있다"
이 발언과 관련해 논란이 일어나자, 성 의원은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발언이라고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 열등의식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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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위인은 생각이 있는 인간인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장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전달하는 행사장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의 선봉장 격인 이토 히로부미를 적합한 예시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그 부적합함을 지적하니, 이제는 열등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사항
- 을사늑약 -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것이다.
 
- 체결의 경위 -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동양평화 유지를 위한 특파 대사로 파견되어 조약체결을 강요했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은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사령관 하세가와를 파견하여 황궁 주변에 군대를 배치하여 대한제국에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했고, 이에 일본은 매수와 회유를 시도했다.
 
11월 17일, 각부 대신들을 공사관에 불러 조약 승인을 꾀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해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가부(可否)를 묻는 등 압박을 가했으며, 이때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고종에게 전가하면서 찬성한다. 이 다섯 명은 을사오적으로 불린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명 중 5명이 찬성했다며 가결을 선언하고,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고종의 칙재를 강요하였다. 11월 17일에는 외부 대신 박제순과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국새와 외무대신의 관인은 훔쳐서 날인했다는 고종의 증언도 있었다. 서명은 다음날인 18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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